피땀으로 한땀한땀

이주연 읽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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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 바튼, 피프티 사운즈, 삿빠리
Polly Barton, Fifty Sounds, sa'pari

4760자
2024년 6월 10일



 ¶ 삿빠리: 이해한 바로는, 흠 잡을 데 없는 마음의 소리

 섬에는 나 같은 사람이 열 명 있었다. 열 명의 외국인들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가리켜 유쾌하게 불렀는데, 그 섬에는 더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예전부터 결혼 뒤 정착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맞는 말도 아니었다. 그 말은 일본 정부를 통해 고용된 원어민 교사 열 명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우리의 공식적인 직함은 영어 보조 교사로, 딱히 자격증이랄게 없었기 때문에 항상 일본인 정식 영어 교사를 보조해 근무했다. 원어민 교사들 모두 몇몇 군데의 학교에 배정되어, 그 섬의 모든 중고등학교와 초등학교 몇 군데를 책임지고 있었다. 섬의 상당 부분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처럼 느껴졌는데 의외로 학교는 굉장히 많았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배정 받은 학교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추첨제로 지정된 근무지와 거기에서 일어난 이상한 사건들을 비교했다. 학생이 단 두 명뿐인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있었다. 학교 급식으로 고래 카레가 나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 재직 중인 학교에서는 어떤 학생이 교사를 벽장에 가둬 버린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내 생각에는 우리 모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추첨제로 지정된 근무지 중 최악이자 최선이라는 비밀스러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내가 일하는 학교 세 군데 중의 하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그 분위기가 너무 싸했다. 보기에는 다른 학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교사들까지도 넌지시 얘기할 정도로 나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내가 영어로 말하면 무시 받았고, 일본어로 말하면 학생들은 어처구니없는 외국인 억양으로 따라 하며 나를 놀렸다. 기억에 남는 일로, 학생이 날 보고 ‘나가 죽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교사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영어 과목 세 개에서 밑바닥을 맴도는 14살짜리 남학생들과 급식실 식탁에 같이 앉았는데, 그 일곱 명 전원이 무릎에 앉은 상상 속 생명체에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걸 보여주기 시작했고 나는 밥그릇을 바라보며 억지로 식욕을 내려고 애썼다.

 한편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그리고 방학 내내 근무하는 다른 학교는 폐쇄적인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천국 같은 곳이었다. 수업은 정말 재미있었고, 결국에는 그게 제일 중요한 점이긴 했다. M과 함께 일하는 영어 교사 Y는 자주 말했다. 섬의 이 동네 출신 아이들은 ‘깨끗하다'고. 그리고 나도 학생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다른 학교의 아이들에 비해 순수해 보였고, 수업 참여에도 열의가 있었으며, 적절한 연약함을 지녀 소리를 내 웃기도 했다. 그리고 Y, 그 사람 자체가 나를 학교에 만족하게 하는 데 한몫을 했다. 나는 비교적 바로 그에게 끌렸다. 다른 학교에서는 내가 마치 유령처럼 연결고리 없이 떠다니는 것 같았지만, Y가 있으면 묘하게도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어 교사로 재직 중인 것 외에도, 그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업무도 맡고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항상 그를 만나러 오는 모습은 거의 교회의 목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로의 책상이 가깝기도 하고, 그가 나를 대화에 껴 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Y가 자리에 없을 때면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특히, S라는 이름의 3학년 여학생은 수시로 직원실에 들락거리며 Y 주위를 맴돌아 점심시간에는 그와 함께 앉아 밥을 먹었고, 따라서 보통은 나도 합석하곤 했다.

 S는 똑똑하고, 수업에 집중하고, 학구적이지만 조금은 수줍음이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영어 구사력은 제한적이었지만, 내가 일본어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기꺼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 아이와 Y, 그리고 내가 삼각형을 그리며 대화하는 많은 시간 동안, Y는 표준적인 통역사라기보다는 언어의 중매자였고 우리의 말문을 열게 하는 관계의 유연제와도 역할을 담당했다.

 어느 날, 직원실에 Y가 없을 때에 S가 내 자리로 다가왔다. ‘선생님 친구를 봤어요.’ 아이는 말했다. ‘캐럴라인.'

 섬에 사는 외국인들이 서로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친한 사이일 것이라는 주민들의 생각에 나는 이미 익숙했다. 하지만 캐럴라인은 실제로 내 친구긴 했다. 근무 중인 고등학교에서 열리는 행사에서, 진학 예정인 학생들에게 연설할 거라고 그녀는 말한 바 있었다.

 '오, 예스,' 나는 영어로 답했다. '쉬 게이브 어 스피치, 라잇?(그녀가 연설을 했지, 그렇지?)'

 '예스, 스피치.'

 '하우 워즈 잇?(어땠니?)'

 '엥?'

 '하우 워즈 더 스피치?(연설 어땠니?)'

 아이는 조금 생각하고는 답했다. '삿빠리.'

 '삿빠리,' 나도 말했다.

 '삿빠리.'

 '오,' 나는 답했고 아이는 돌아갔다. 나는 내 공책에 로마자 알파벳으로 ‘삿빠리’를 받아 쓰고, 다시 공들여서 히라가나로 さっぱり라고 썼다.

 일본에 도착한 지 몇 달이 지난 이때는,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를 실제 단어로 받아 적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 뒤였다. 이제 나는 단어를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뼈대를 갖추고 있었고, 거의 모든 단어가 후자에 속했다. 내가 아는 단어는 몇 개 없었지만, 다음에 마주치는 단어로 수수께끼 전부를 해결할 것처럼 모르는 단어 하나하나를 소중한 단서처럼 수집하며 진지한 탐정처럼 굴었다. 메모를 많이 적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모든 걸 이해하려 했으며, 전자사전을 항상 곁에 두고 온 정성을 쏟았다. 사전은 과묵할 때도, 지금처럼 수많은 해답을 말해줄 때도 있었다. 내가 하나를 선택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정의를 알려줘 내 머릿속에 수많은 갈림길을 안내해 주기도 했다.

 ‘삿빠리'의 정의로 먼저 ‘상쾌해지다’, ‘산뜻해지다’, 그리고 ‘남김없이', ‘말쑥한, ‘깨끗한’이 나왔다. 그다음은 ‘숨김없이’, ‘솔직한’, ‘담백한’이 뒤를 따랐다. 이 단어들을 통해 나는 아직 모호하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어떤 실마리를 느꼈다. 마지막 정의는 ‘완벽히’, ‘완전히'로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었다.

 흠, 나는 생각했다. 그 어느 단어도 강단에 서서 수많은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연설을 묘사할 수 있는 형용사 같지 않았다. 아니면, 그 어느 단어도 영어권에서는 연설을 묘사할 수 있는 형용사 같지 않다고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캐럴라인이 연설을 한 방식을 보고 S가 느낀 안도감이 반영된, 일본인만의 감수성일지도 모른다.

 캐럴라인은 글래스고 근처 출신인데, 사람들이 자기 말을 알아듣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이미 ‘걸(소녀)'의 발음을, 본래의 ‘게룰'에서 여기 사람들이 익숙한 미국식 발음법에 가까운 ‘가아알'로 수정해서 말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의 연설이 ‘깨끗하게' 느껴질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을 것 같았지만, 나는 캐럴라인의 솔직함을 높이 평가해 왔다. 특히 몇몇 원어민 강사들은 다소 호들갑스러운 미국인들이었기 때문에, S도 나와 같이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캐럴라인의 전달력에 있어 이런 추상적인 부분을 언급한다는 건, 제2외국어로 진행한 연설을 들은 어린 학생이 보이기에는 상당히 수준 높은 반응 같았다. 아마도 내가 기대했던 것, 즉 이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내가 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의 증거가 아닐까 싶었다. 아이의 입을 통해 나오는 영어는 제한적일지라도, S가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은 거의 불가사의해 보였다.

 그 주말에 캐럴라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그녀에게 연설이 어땠냐고 물었다. 그녀는 네가 다니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몇 명 왔더라고 말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 한 명이 그녀를 봤다고 나는 답했다.

 ‘그래? 그 아이가 뭐래?’

 ‘글쎄,’ 나는 말했다. ‘연설이 아주 상쾌했다고 하더라.’

 캐럴라인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말을 이었다. ‘걔가 특정한 단어를 말했는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그런데 깨끗하다, 또렷하다, 상쾌하다, 뭐 이런 뜻인 것 같아. 긍정적인 의미 같던데.’

 캐럴라인은 일본에 사는 대부분의 외국인이 만들어내는, 이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이해의 필요성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이라는 의미의, 진짜 일본어에 있는 소리는 아니지만 특정한 종류의 ‘흐음' 소리를 냈다.

 몇 주 후에야 나는 이 단어에 대해 Y에게 물어봤는데, 그때는 이미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고 있었다.

 ‘삿빠리의 뜻이 뭐예요?’라고 나는 물었는데, 그가 곧바로 대답해 주지 않자 나는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이 돈 언더스탠드,(이해가 안 가요,)’라고 그는 영어로 답했다. ‘무슨 얘기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네? 왜죠?’

 ‘뜻 자체가 그거예요. 삿빠리는 삿빠리 와카라나이를 줄여 말한 거거든요. 나는 전혀,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내 앞의 여백을 응시했다. 내가 충격을 받은 건, 내가 지어낸 난해한 해석에서 뻔한 현실로의 추락이 아니라 Y가 S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한 그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언어의 세계에서는 이 운 나쁜 탐정이 그 누구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강타해 왔다. 대부분의 경우, 여기서 전문성이란 가장 열심히 하거나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이 가지는 게 아니라, 가장 평범한 생각만 하는 사람, 또는 자기 생각을 인정받을 필요 없이 다른 사람이 말하는 바를 온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이 평범한 사람은 언어의 땅이 어떻게 다져져 왔는지 이미 알고 있어서, 수많은 갈림길 중 무엇이 맞는 길인지 바보처럼 고민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 ‘이 단어들로부터 사방으로 익숙한 길들 여러 갈래가 이어진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사방으로 퍼진 길들을 몇 번이고 걸어가 본 사람만이,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 곧장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후기

 폴리 바튼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21살의 나이에 JET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에서 영어 원어민 교사로 일한 바 있다. 그 뒤 일본의 시골과 대도시를 오가며, 또 영국으로 돌아가 일본어 실력을 살려 일하기도 하며 오랜 시간 동안 느낀 일본 사회에 대한 호기심과 좌절, 그리고 일본어라는 언어에 대해 해당 에세이에서 풍부하게 다룬다. 인터넷에 범람하는 ‘익스팻(expat)의 일본 유랑기’와는 조금 다른데, 백인 여성이 일본 사회에서 겪을 수 있는 교차적 정체성을 굳이 예쁘게 포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각 장의 제목은 모테모테(モテモテ, 대단한 인기를 끌다)나 힛소리(ひっそり, 조용히) 같은 일본어 단어로 구성되지만, 바튼의 개인적 경험해서 우러나온 해설이 들어가 있어 그녀가 겪었을 ‘번역에서 길을 잃는(lost in translation)’ 느낌을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처절하게 묘사한다. 현재 바튼은 영문 브리스틀에 살며 일문학 번역가 및 비평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영국의 출판사 피츠카랄도 에디션에서 매년 주최하는 피츠카랄도 에디션 에세이상의 2019년 수상작으로, 처음으로 이 책을 읽었을 때의 감동과 동질감을 잊지 못해 일부 번역해 보았다. 나는 22살의 나이에 워킹 홀리데이로 도쿄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전까지는 카페나 식당 등의 단순 아르바이트만 해 봤으니 그 강사 일자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진 ‘어른스러운' 직업이었다. 일본어를 배우는 외국인으로서, 외국어를 배우는 일본인을 마주하며 매일 경험한, 어둠 속 코끼리 다리 더듬기와도 같았던 대화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외국인 여성으로 생활하며 겪었던 경험들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삿빠리' 했던지. 바튼의 이야기가 상쾌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영국 출신의 백인 여성으로서, 또한 영어라는 언어가 가지는 권력이 한국어보다 상당하다는 점에서 바튼의 경험은 나의 경험과는 다른,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바튼이 일본에서 ‘꿀 빨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에세이 후반부로 갈수록 바튼이 일본 남자와의 연애를 통해 겪었던 고립감, 일본어 실력이 좋아질수록 생기는 오해들, 영어권 백인들이 일본에 대해 가지는 환상의 격차 등이 아주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비트겐슈타인 전공자로서 일본어라는 언어를 촘촘하게 분석하기도 한다. 또한 청각적, 촉각적 묘사를 총동원해 공감각적으로 쓴 부분이 많아, 일문학과 영문학의 중간 지대에서 독특한 구조를 일궈냈다는 생각이 든다. 바튼이 그려 내는,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채로 다이빙하고, 심연으로 잠수하고, 꼬르륵 소리를 내고, 허파에 물이 들이치는 감각을, 번역을 통해 느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한국어로 출판하기를 희망하는 곳이 있다면 내가 전문을 번역할 수 있을 텐데…